간단히 말해서 분별심이 없으면 부동심이 됩니다. 그럼 분별이 뭔지를 또 알아야 되겠죠. 분별이 뭔지 아시죠? 우리가 이 공부를 할 때 말의 뜻을 정확하게 알고 들어가서 그 말의 뜻에 맞게끔 정확하게 행을 해야 돼요. 그냥 말로 해가지고 되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분별을 한다는 것은 ‘이게 맞고 저게 틀리고’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고’하는 그런 시비를 가리는 것입니다. ‘이건 해야 되고 이건 하면 안 되고’ ‘저렇게 하면 되고 저렇게 하면 안 되고’이런 거 말입니다. 일체 있는 그대로 보는 거, 틀렸다고 보지 않는 거, 바로 그런 것이 분별심을 떠나는 것입니다. '이게 맞고 저게 틀리고'가 없으면 이걸 보든지 저걸 보든지 분별하는 마음이 없을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모두를 다 부처님의 나툼으로 본다면 거기에 어떠한 현상이 나타나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거 아니에요. 그렇죠? 그래서 그런 것이 없으면 부동심이 됩니다.
그렇지만 부동심이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움직이지 않는 그런 마음이 아닙니다. 결국은 분별이 없으면 움직이지 않으면서 모든 것을 움직이는 그 본래자리가 됩니다. 그러나 일단은 분별하지 않으면 상황에 따라 움직임은 없겠죠. 그러나 그렇게 들어가다 보면 나중에 공자리를 알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은 영원한 부동심이 되는 거죠. 그건 움직이는 바 없이 움직이는 부동심이 되는 거죠. 항상 어떠한 상황에서든지 판별은 하지만 그것은 움직이는 분별심과는 다릅니다. 그리고 알고 나서 ‘이건 이렇게 해라’ '저건 저렇게 해라’ 하고 가르치는 것은 또 분별심하고 다릅니다. 여러분들이 공부를 하면서 앞에서 가르치는데 가르치는 사람한테 분별한다고 생각하면 안돼요. 어쨌든지 본인이 공부하는 중에는 남을 시비분별하면 안되죠. 그건 남의 문제고 자기 공부해야 되니까 자기가 분별을 안해야 되는 거죠. 일체 분별하지 않으면 마음이 움직이지 않겠죠.
분별하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단계에서는 아직은 분별을 하고 있으니까 분별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죠. 그때는 분별하지 않으려고 들어가는 것이고 결국은 나중에 분별을 하지 않다가 보면 분별하지 않는, 분별이 없는 그 자리로 듭니다. 그러면 그 때는 여기 말하는 ‘부지런히 지혜의 혜가 밝아서’ 지혜의 혜가 밝은 그 부동심이 되는 거예요. 그러나 처음에는 지혜의 혜가 안 밝았어도 '내가 분별을 하지 않아야겠구나.'‘아, 이렇게 분별을 하지 않는 것이 지혜의 혜가 밝은 길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걸 알면 일단 그건 지금 가는 길이거든요. 아직 지혜는 안 밝았어도. 그 쪽으로, 지혜로 가는 길이니까 '무조건 분별하지 마라' 그러면 나중에는 지혜의 혜가 밝아진다. 밝아서 그 부동한, 영원히 부동한 자리를 알게 된다, 눈을 뜨게 된다, 이런 얘기예요. 아시겠어요?
여러분 그렇게 해가지고 지혜의 눈이 밝아가지고 우주와 둘이 아니게 되겠습니까? 아니면 주변사람한테 좀 내가 큰 소리쳐서 이겨가지고, 분별해서 이겨가지고 잠깐 만족하겠습니까?
질문: 스님께서 저번에 말씀하시기를, 나한테 잘해주는 사람한테만 잘해주는 것은 착한 척 하는 거라고 그렇게 얘기 하셨는데, 저는 그 착한 척 하는 것도 아직 힘들거든요. 그러니까 잘 해주는 사람한테도 잘 못하는데 잘 못하는 사람한테는 마음이 안가서요. 저는 아직 착한 척도 잘 못하고 있어서 이 분별하지 말라는 말이 저한테는 많이 어려워요.
아, 지금 그 말 자체가 이해가 안되죠?
질문: 예. 잘 안돼요.
이해가 될 때 까지는 그거 그냥 공짜로 나이 안 먹거든요. (웃음) 여기 계신 분들이 지금 우리 법우님 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공부를 했거든요. 그래서 그것이 공짜로 얻은 게 아니라서, 아직은 그것도 구분이 안 되는 거예요. 이게 맞는지 틀리는지도 구분이 아직은 안 되는 거고. 여러분도 그랬죠? 많이 그랬죠. 저한테 막 대들기도 하고 막 그랬죠. (웃음) 그게 맞냐고 하고. 왜냐하면 그게 정상이죠. 여러분이 그걸 다 알았다면 이미 차원이 높아서 이미 분별 안하고 이미 다 도인이 돼서 살았을 건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계속 분별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게 틀렸다고 하니까 그게 맞다고 여러분들이 분별한 거잖아요. 이렇게 해야 맞다고. 그랬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까 그게 이해가 안 되잖아요? 그런데 그건 제 말이 아니고 경전입니다, 경전. 법이에요, 법.
경전이라고 해서 또 이 경전만으로 보지 마시고 진리가 그러합니다. 진리가 그러하니까. 우선은 그러면 일단 이해는 해야 되겠지만, 이게 이해가 되어가지고 되는 것은 아니에요. 왜냐하면 내가 그 차원을 모르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됩니다. 이해가 안 되니까 '마음 정진하는 마음 부지런히 지혜의 혜가 밝아서....' 하고 자꾸 정진하라고 하죠. 그렇지 않으면, 다 알 것 같으면 정진할 것 뭐 있겠습니까? 그래서 지금은 모르면 모르는 대로 그냥 이게 진리니까 진리에 맞게끔 내가 맞춰버리면 좀 쉽습니다. 이해를 하고 들어가려면 좀 더 어려울 수가 있어요. 이해가 되든지 안 되든지 정답이 그러하다고 하니까 무조건 정답 쪽으로 가는 사람은 되고 그렇지 않고 다 따져 가지고 하는 사람은 이해 될 때까지 시간이 흘러야 되겠죠. 안 그래요? 누구나 다 그런 과정을 거쳐가지고 왔어요.
전에 우리 선생님들도 막 저한테 많이 따지고 그랬죠. 그게 맞냐고. 제가 처음에 청년법회 들어가니까 막 따지더군요. 왜 안 맞는 얘기를 하느냐고. 그런데 자기 말이 맞는 얘기라면 자기가 이미 진리자리에 들어있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죠? 자기가 지금 현재 진리하고 하나가 안 되어있기 때문에 다른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에 가르치는 사람은 먼저 선지식이라 먼저 알아가지고 알고 있는 걸 얘기 하는 거니까 그건 내가 모르는 게 당연하거든요. 그러면 그게 맞겠다 생각하고 그 쪽으로 내가 노력을 해야 되는데 그걸 안하는 거예요. 그게 조금 다르더라고요.
저는 처음에 시작할 때 무조건 하나라고 그러고 둘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게 맞는지 틀리는지 나는 몰라도 그냥 무조건 둘이 아니게 해버렸어요, 무조건. 그게 정답이라고 하니까. 그러고 다른 생각은 없었어요. 둘이 아니게 되는 것만 했죠. 둘로 보는 것을 둘로 안 보는 쪽으로만 합했지 다른 이유가 없었죠. 그 당시에(출가 전에) 같이 공부하던 법우들이 나한테 법담을 하거나 무슨 얘기를 하면 '저 법우가 큰스님이다' 하고 듣고, 큰스님이나 법우나 똑같이 본 거죠. 일체 모든 것을 '둘이 아니다. 둘로 보지 말라' 하면 일체 둘로 보지 말아야 되잖아요? 개미가 지나가도 개미하고 큰스님 하고 똑같이 봐야 되잖아요? 안 그래요? 법은 그러해요.
여러분들은 큰스님 말씀은 딱 믿고 도반들이 말하면 탁 치워버리잖아요. 그러죠? 그런데 법은 분명히 둘로 보지 말라고 그랬거든요. 그러면은 어느 게 맞아요? 이런 모순을 많이 갖고 있습니다. 큰스님 말씀은 딱 믿고 법은 행하지 않고.... 그런데 그걸 자기가 잘 행하고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는 거죠. 분명히 법은 둘로 보지 말라고 그랬으면 위아래를 똑같이 둘로 보지 말란 얘기예요, 일체를. 그런데 그게 아니고 큰스님 말씀만 믿고 이 법은 그대로 안 따르는 거죠. 그래서 진도가 안 나가는 거예요. 저는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지 그건 몰랐죠. 그랬는데 나중에 보니 그렇게 하더라고요. 큰스님 말씀만 듣고 주변 동료 말이나 이런 것은 다 치워버리는 거예요. 탁 무시해버리고...(웃음)
대중가운데서: 맞습니다!
맞죠? 그리 하더라고요. 그래서 안 되는 거더라고요. 그러니까 일체를 둘로 보지 말라. 개미새끼든지 저 구렁이든지 아주 나쁜 사악한 독사든지 일체를 둘로 보지 말라 하는 것이죠. 그래서 일체 분별하지 말라는 거죠, 일체를. 그러면은 법대로 해야 되는 것이지, 부처님 모습이 법이 아니라 부처님 법이 법인 그예요. 그 법대로 행을 하면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굳이 따로 어떻게 할 필요는 없어요. 법대로 하기만 하면 되는 거예요. 안 그래요? 신도님들은 그것보다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서 어떻게 쉽게 조금 편안하게 살고, 쉽게 조금 법을 구하고 그런 걸 원하시겠지만 그런 거 없습니다. 눈꼽만 한 거 하나라도 다 내가 해야 되는 것이지, 내가 하는 걸 가르쳐 주는 것이지, 그게 부처님 법이지, 부처님께서 그 법을 깨우쳐 가지고 그 길을 안내하는 것이지 그 뭐가 있습니까.
그래서 일체를, 일단 그게 맞든지 틀리든지 내가 가서 만약에 둘로 보지 않고 분별하지 않고 있다가 잘못되어가지고 손해를 보면은, 그때 아니다 싶으면 돌아서더라도 일단은, 내가 일단은 믿고 공부를 한다면은 그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제가 다 그렇게 했기 때문에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래 그 얘기 했잖아요. 예전에 내가 안 깬 걸 깼다고 했을 때 그 사람하고 나하고 하나니까, '만약에 깬 사람 따로 있고 내가 따로 있다면 둘이 되니까, 그러면은 이 법에 안 맞네.' 그러니까 깬 사람이 나고 내가 깬 사람으로 하나만 돼야 되니까, 법대로는 하나만 돼야 되니까 그럼 내가 깼다. 안 깨 놓고 내가 깼다. 그게 정답이더라고요. 그런데 일반적으로 말하면 "분명히 안 깼는데 왜 깼다고 합니까?" 하고 이유를 다는 게 일반적인 말이고, 법으로 한다면은 하나가 되어야 되니까 그 깬게 맞는 거더라고요.
그래서 그렇게 하다가 보면은 일체 분별이 없죠. 일체 어떠한 경우가 와도 분별이 없어져 버리니까 속이 조용하죠. 갖다가 나를 뭐 어떻게 하든지 간에 속이 조용하죠. 왜냐 하면은 그 법이, 내가 어떠한 상황에도 안 움직이는 것이니까. 나를 갖다가 죽인다고 하든 살린다고 하든, 내가 안 움직여야 되는 것이, 그것이 내가 해야 될 법이니까 나는 법대로만 하는 거죠. 너는 왜 공부를 그렇게 하느냐 할 필요도 없는 거고 위든지 아래든지 다 소용 없습니다. 자기 공부해야 되잖아요. 사람들은 위에서 왜 그렇게 하느냐고 하는데 일체 그런 거 다 필요 없어요. 위고 아래고 전부 평등해야만 되니까 그냥 일체를 똑같이 보는 거죠.
그래서 그러한 큰 것을 얻겠느냐 아니면 그냥 내가 시비하면서 그냥 내가 원하는 대로 살겠느냐 그 차이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법우님, 잘 생각해보세요.(웃음) 그런데 이런 것도 자꾸 듣다가 보면은 이해가 되면서 사람이 달라져요. 달라져가지고 어느 날 딴 사람이 되거든요. 그 참, 그러니까 이게 희한해요! 그리고 차츰 차츰 듣다 보면 그게 맞다는 생각이 들어요. 들면은 이제 차츰차츰 하게 되죠.
(2007.03.16 경전법회 중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