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상에 속지 말고 찰나 찰나 쓰고 놓으며 자유롭게 살라

다만 우리가 지혜를 꺼집어 낸다고 하는 것이 고정된 지혜가 아니고 그렇게 문제에 따라서 지혜가 나오는 거죠. 그런데 또 이 공부를 하다보니까, 내가 없다고 하니까 '그건 또 됐는데 또 무슨 지혜를 끄집어내라고 하고... 이것은 또 어떻게 하란 말인가?' 하는데, 그러면 우리가 '내가 없다'하고 안삽니까? 살잖아요? 예를 들어, 내가 서울에서 여기 와도 내가 생각을 내야 오는 것 아니예요? 내 안에서 생각을 내야 오고, 내가 무슨 일이 있는데 '이것을 돌려야 되겠다. 이것을 돌리고 이쪽으로 와야 되겠다.' 그러면은 또 생각을 돌려 가지고 놓고 와야 되는 것 아니예요? 안 삽니까? 지금? 다 숨 쉬고 살잖아요. 호흡 들이 쉬고 내쉬고, 생각 들어가고 나가고 계속 하면서 삽니다.
 
그러니까 내가 없다고 해서 고정된 내가 없는 것이지 내가 없는 게 아닙니다. 살아있는, 항상 움직일 수 있는, 살아 있는 내가 있는 거예요. 그 '참나'. 항상 이것이라 고정 안 시키고 항상 가능성이 있는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는 그 '나'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 '나'를 활용해서 굴려 가지고, 지혜롭게 굴려 가지고 쓰고 놓고 쓰고 놓고 하라는 겁니다. 아까 그랬죠?  어떠한 지혜도 고정된 지혜가 아니라고 그러니까 쓰고 놓으세요. 그게 없는 거니까. 그래 쓰고 놓고, 쓰고 놓고... 그래 내가 없으니까 내가 이것 맞다고 고집 부리지도 말고, 얼른 쓰고 놓고 쓰고 놓고 이렇게 하라는 거예요. 아시겠어요?
 
그렇게 하면은 항상 내가 없는 상태에서 필요할 때는 없는 데에서 지혜를 내어서 쓰고, 그러나 그것을 필요할 때 마다 '꼭 이것이 되어야 된다', '이것이 절대로 안 되면 안 된다' 이런 집착이나 이런 목표나 이런 것을 두지 말고 하라 이 말이 예요. '하지 마라'가 아니고 내가 어디가고, 약속해야 되고, 또 무엇을 해야 되고, 결정지어서 해야 되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냥 할뿐이지 ‘절대로 이렇게 되어야 돼’ 이렇게 하지 말고, 놓고 한생각 내서 하라 이말 이예요. 그런 것이지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삽니까?
 
그게 창조하고 소멸 하고 같이 돌아 가요. 항상 호흡은 들이 쉬고 내쉬지 않아요? 들이 쉬기만 해도 안 되고 내 쉬기만 해도 안 됩니다. 호흡을 항상 들이 쉬고 내쉬고 들이쉬고 내쉬고, 항상 생각이 들랑날랑 들랑날랑 합니다. 그게 우리가 사는 거예요. 우리 숨 안 쉬면 죽잖아요? 그렇듯이 우리 생각도 들랑 달랑 안하면 죽습니다. 끝이예요. 죽으면 들랑 달랑 안 하죠? 그래서 들랑 날랑 하는데 고정이 안 되어서 하나가 나왔다, 들어갔다, 나왔다, 들어갔다 하니까, 계속 나왔다 들어갔다 하니까 붙잡지 말고 목적지 두지 말고 한생각 내서 쓰고 놓아라, 그리고 아무것도 없다, 또 필요할 때 쓰고 또 놓아라, 나도 그렇고 남이 생각한 것도 고정되게 보지 말고 일체 이 세상에 있는 만물 만생을 다 고정되게 보지마라, 그것은 사라지는 상이다.... 안 그래요?
 
어떤 것도 계속 변하고 있습니다. 안 변하는 것 봤어요? 숨 안 쉬는 것 봤어요? 움직이지 않는 것 봤어요? 계속 변합니다. 돌이나 이런 것들도 계속 변합니다. 찰나 찰나 순간순간 계속 변해요. 그래서 어느 모습이 그게 그 모습이 아니다 이거죠. 계속 변하게 하는 장본인이 그 주체다 이 말이 예요. 변해있는 그게 그게 아니고 변하게 하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밖에 있는 어느 모습, 예를 들어서 누가 나한테 기분 나쁘게 화를 냈다, 아니면 나쁜 짓을 했다 하더라도 그 모습이 그가 아니 예요. 그것은 순간  있다 사라지는 것, 그리고 그 본체는 나한테 나쁘게도 할 수도 있고 그 다음날 좋게도 할 수도 있고, 그 다음날 더 좋게도 할 수도 있는 그 부처가 있는 것이죠, 그 안에는.
 
그러니까 순간 한 것을 그것을 무엇이라 하지마라, 그것은 이미 없고 그것만 나한테 잡혀 가지고 나를 얽매이게 하잖아요. 그가 나한테 그랬다고 하죠? 그가 나를 괴롭혔다고, 그래서 기분 나빠 죽겠다고... 나는 내 안에 담겨져 있지만 그는 이미 아무것도 몰라요. 그런 경우 많죠? 아무것도 모르고 그는 이미 딴 사람 되어서 딴 짓하고 있어요. 그런데 나 혼자 속에서 '네가 그랬다...'고 하고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너'라고 하는 그것이 어디 있어요? 그 사람은 이미 딴사람인데, 벌써 변해가지고 따른 사람인데...
 
그래서 바깥으로 드러난 그러한 모습에 속지마라, 다 허깨비니까 속지마라, 다 허상이다,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 다 일체 만물 만생이 나와 둘이 아니니까 내가 필요할 때 통신해서 쓰고, 필요할 때 안에서 지혜를 꺼집어내서 쓰고 그렇게 마음대로 쓰되 놓고 써라 하는 겁니다. 다 놓고 쓰세요. 집사람이든지 아들이든지 부모든지 다 놓고 쓰세요, 다 놓고. 착을 붙이지 말란 이야기죠, 착을. 그 순간순간에 순간 그 모습도, 예를 들어 아들이 애를 먹인다 해도 그 모습도 그게 다가 아니예요. 그 순간 애 먹이는 거지. 그 순간 찰나 나타나는 거예요.  거기에 탁 속아 가지고 엄마는 계속 계속 두고두고 '괘씸한 아들아...' 그러나 그 아들은 이미 그때 싹 하고 어디로 가 버리고 없어요. 이미 다른 아들이예요. 좀 있다가‘엄마'하고 오잖아요. 그죠? 그러면은 인제 '이녀석 두고 보자' 했다가도 엄마’하고 오면 그건 어디로 가 버리고 없고... 안 그래요?
 
그러니 얼마나 허깨비 노릇을 하고 있느냐구요. 자식한테 속고 남편한테 속고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을 애를 먹여 놓고 자기는 모른다 그러죠? 나중에 아무렇지도 않게 싹 들어 오거든요. 그러면은 사람 그렇게 속 태워 놓고 자기는 멀쩡하다고 그러죠. 속은 누가 탔습니까? 스스로 탄 거지.(웃음) 그래서 그러한 것을 바로 보는 것, 그 허깨비를 허깨비로 바로 아는 것 이게 우리 공부예요. 그래서 거기에 속지 마라, 그 어리석음, 무명, 모르고 잘못 착각하고 있는 것, 그것만 제하면 이 도(道)는 바로 나타난다, 도는 바로 알게 된다, 자기 자성을 바로 알게 된다 이말이예요. 그놈이 싹싹 변해 가지고 돌아가고 있는데 거기에, 그 모습에 다 속아가지고 끄달리는데 사실은 그게 나가 아니다, 그게 나도 아니고 너도 아니다 이말입니다. 아시겠어요?
 
 
(2007.11.21 경전법회 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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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장자
아래 글 '모든 죄업을 한꺼번에 소멸시키는 도리 '에 바로 이어지는 법문입니다.
주제가 달라서 분리해서 따로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