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비하지 않고 대화를 해 보셨습니까?
서미순(여 42세)
우연한 기회에 청년 수련회에 참가하여 스님을 처음 뵈었다. 3박4일의 일정으로 갔는데 그 주에 시어머니 생신이 있어서 나는 2박 3일만 참가한 후 주말에 오기로 하고 출발을 하였다. 공부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지라 무슨 말인지도 잘 모르고 처음 접해 본 수련회였지만, 난생 처음 수행선시를 쓰면서도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이 너무 좋았다. 시어머니 생신은 내년에도 차려드릴 수 있지만 이 수련회는 지금 하지 않으면 내 생애 다시는 할 수 없다는 마음에 결국 3박4일 일정을 모두 마치고 스님과 헤어지면서 하염없이 울었다.
스님께서는 아무 말씀 안하셨지만 마음으로 이미 하나가 되어 주셨다. 그 날 집으로 돌아가 남편 앞에 무릎을 꿇고 미안하다고 하니 “당신이 큰소리를 쳐야 내가 화를 낼 텐데 그렇게 자존심 강한 사람이 무릎을 꿇고 있으니 내가 할 말이 없다”하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다음날 시부모님께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하였다. 내가 하고자 하는 공부를 하였으니 이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고 오히려 감사했다. 그 이후로 맛은 보았는데 스님과 멀리 떨어져 있으니 마음이 충족을 하지 못해 그 갈증에 목이 말랐다. 혼자서 경전도 읽어보고, 요전도 읽어보고 열심히 쫓아다녔지만 늘 목이 말랐다. 그러고 있던 찰나 스님께서 아르헨티나로 가셨다는 소식을 접하니 더욱 더 애절하였다.
그러면서 또다시 나는 예전의 나로 돌아가 버렸다.
“야! 너는 왜 그 모양이냐? 정말 성에 안차서 못 키우겠다. 제대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네. 아무리 내 자식이지만 창피해서…….”
“당신은 왜 그렇게 허구한 날 술만 마셔요? 그렇게 술이 좋으면 술이랑 살지 왜 나랑 결혼했나 몰라, 정말 지겨워”
이런 식으로 늘 아이와 남편과 실갱이를 하면서 말을 내뱉고 난 후에는 후회를 하였다. 그런데도 왜 그리 고쳐지지 않는지……. 그러면서 대인관계론, 현실치료, 부모교육 세미나, 아동 심리학, 아동과의 대화법 등 많은 강의들을 찾아다니며 들었다. 들을 때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훔치며 그렇게 하겠노라 다짐을 하였건만 막상 집에 들어서서 남편과 아이의 행동을 보면 마음에 안 들어 바로 말이 비꼬아져서 나갔다. 늘 남편과 자식이 잘못됐다고 상대를 고치려고 그렇게 해도 고쳐지지 않고 속상해하면서 지내던 어느 날 다시 스님을 만나 마음공부를 하게 되었다. 스님께서 한국에 다시 오신 것이다. 갈라진 땅에 법비가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번에는 스님의 법을 놓칠 수 없다. 마산에서 경산까지 먼 거리였지만 하나도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법회 자리가 이렇게 있다는 것만으로도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이었다. 법회를 하면서 매주 공부한 것을 적어갔다. 그러나 사실 나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나를 점검받아야 수정하고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열심히 있는 대로 실천하며 부딪히며 적어가서 그렇게 스님께 점검을 받았다.
아이가, 남편이, 부모님이 잘못됐다고 늘 얘기를 했는데 막상 공부를 하면서 모든 잘못의 근원은 ‘나’임을 깨닫게 되었고,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것인지 스님의 가르침을 듣고 하나 하나 실천해가면서 매사에 부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내가 점점 긍정적인 시각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고 상대가 모두 잘못됐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어느 날 “그 상대들이 나를 힘들게 한 것이 아니라 내가 그 상대들을 정말 힘들게 하고 있었구나.” 알게 되니 정말 감사하였다. 이렇게 되기까지 스님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어찌 가능한 일이었겠는가!
하지만 공부를 해가는 과정 중에도 부딪힘은 계속 이어졌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오는 것에 대한 불만이 조금 누그러들긴 했지만 여전히 화가 났다. 공부를 하고 있으니 넓은 마음으로 이해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 아니었다. 그냥 아무 말 안하고 있을 뿐이었지 표정에는 무시하는 표정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내 모습은 모르고 나는 잘 참고 있다고 생각했고 그 상대는 그렇게 여기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남편을 쳐다보다가 화장실에 들어갔는데 욕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고 너무나 놀랐다.
“내가 이렇게 상대를 쳐다보고 있었구나…….” 차라리 퍼붓는 것이 낫지, 한없이 낮게 보는 그 무시하는 내 얼굴을 보는 순간 소름이 끼쳤다. 이것이 나의 모습이었으니 그 상대는 얼마나 힘들었겠는가! 정말 아무 말 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 입으로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지 표정에는 말없는 말을 하고 있었고 마음속으로도 수없는 말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일을 계기로 진실로 상대와 둘이 아닌 마음이 되었을 때, 아무 바람이나 기대가 없이 얘기를 할 때 하나가 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난 후에 차츰 더 내 정리를 할 수 있었고 가족을 바라보는 마음이 좀 더 자유로워졌다.
올해 초에 남편이 그 전에 하던 업무에서 다른 업무로 바뀌면서 많이 힘들어하였다. 남편은 그 업무를 몇 년 동안 해왔기 때문에 자신이 있었는데 상사가 바뀌면서 업무도 같이 바뀌게 된 것이었다. 변화를 두려워하는 남편은 업무도 업무지만 대인관계에서 자신이 철석같이 믿었던 상사가 다른 보직으로 발령이 나니 허탈감 때문에 더 힘들어 하였다. 또한 시간은 조금 여유로워졌는데 보수가 줄어들었다. 그 일로 고민을 하기에 어차피 상황은 이렇게 벌어졌는데 이 상황을 힘들어할 것이 아니라 이 상황을 어떻게 지혜롭게 활용할 것인가를 생각해보자고 하였다.
지금까지는 업무 때문에 자기 계발을 위해 투자하는 것이 힘들었는데 올 한해는 자기 계발을 위해 투자를 해보는 것이 어떻겠냐고 의견을 제시하였다. 그랬더니 다른 분도 그렇게 얘기하더라 하면서 그렇지만 보수가 줄어들어서 배우고 싶은 것도 못한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고 인터넷을 찾아보니 배우려고만 하면 요즘은 도서관 평생교육원에서도 무료 수강하는 과목이 많았다. 남편에게 야간에 개설하는 과목도 있으니 퇴근하고 두 시간 정도 공부를 하면 좋을 것 같다고 얘기를 하였다. 지금은 열심히 운동도 하고 공부도 하며 상황을 즐기고 있다. 사실 보수가 줄어들면 가장 피부로 느끼는 사람은 가정 살림을 꾸리는 주부이다. 오히려 나한테 미안해서 더 그랬겠지만 내가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그 상황을 탓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더 아껴 쓸 수 있는가를 연구하고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방법들을 찾아보며 이 상황을 받아들이니 남편도 편안해했다. 외부 강의가 들어오면 감사한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서 즐겁게 일을 하는 내 모습을 보더니 남편은 기름 값을 아껴야겠다며 요즘은 대중교통을 이용하여 출퇴근을 한다.
이 상황에 대처하는 나를 보면서 과거를 떠올려본다.
과거에도 물론 남편은 다른 많은 일로 괴로워하였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 귀담아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뭐 그런 것 가지고 그러냐는 식으로 무시해버렸다. 직장을 옮기는 것에 대해서 의논할 때도 당신 알아서 하라는 한마디 얘기만 했을 뿐 왜 그런 고민을 하는지조차 알려고 하지 않았었다. 그 뿐만 아니라 내 뾰족뾰족한 마음으로 상대의 말을 듣고 있으니 상대에게 하는 말도 뾰족뾰족한 가시로 말을 하게 되었다. 왜 남편이 꽉 막힌 벽하고 얘기하는 것 같다고 했는지 이해가 된다.
차근차근 상대의 얘기를 들으니 저절로 해결점이 나오게 되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남편이 직장일로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나도 직장에서 똑같은 상황에 처하게 되니 남편이 이해가 되고 나를 조절하여 지혜롭게 해결할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마음 하나 어떻게 바꾸느냐에 따라 삶은 이렇게 달라지고 있다. 돈도 안 드는 마음 바꾸기 정말 신기하고 신비롭다.
마음공부를 하면서 우리의 삶 자체가 한편의 영화를 찍으면서 게임을 즐기고 있을 뿐이라는 것을 직접 체험을 하니 살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다. 예전에는 무슨 일을 시작할 때 고민하고 또 고민하고 나는 할 수 없는 작디작은 존재로 여겼었는데 내 본질은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고 무한한 에너지를 끌어서 쓰고, 다 쓰고 나면 집어넣어서 또 필요하면 끌어 쓰고, 얼마든지 재창조하고 소멸할 수 있음을 알게 되니 두려울 것이 없었다. 무엇보다 나를 사랑하게 되고 내 존재가 완전한 존재임을 알게 되니 다른 상대도 위대한 존재로 여겨지고 아끼고 사랑하게 되었다.
어느 날 남편에게 “당신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요?” 물으니 “당신이랑 잘 살고 싶어.” 한다. 어떻게 살고 싶은지는 구체적으로는 생각해보지 않았다고 하여 그럼 당신이 살아오면서 가장 힘들었던 적이 언제였냐고 물으니 초등학교 5학년 때 철봉을 하다가 미끄러지면서 척추를 다쳐서 2년 동안 학교도 못가고 누워있었을 때라고 한다. “정말 힘들었겠네요?” 하니 “말로 다 못하지…….”하며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파도 돈이 없어 약도 제대로 못쓰고 있다가 누나들이 벌어온 돈으로 병원에 가니 너무 늦어서 수술을 해도 다리를 절뚝거리게 된다고 하였단다. 그래도 수술하기로 결정을 하고 집에서 기다리는 동안 누워서 라디오를 듣는데 자신의 증세와 너무 비슷한 사람이 전화로 의사선생님과 상담을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단다. 그 이야기를 아버님께 말씀드리니 그럼 그 병원에 한번 가보자고 하여 병원을 찾아갔단다. 그 의사선생님께서는 너무 움직이지 않고 누워있어서 굳어서 그러니 조금씩 움직여보라고 하셨단다. 이미 허리뼈는 굳어있었지만 그래도 수술을 하지 않고 지금까지 잘 지내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들으며 “그래서 당신이 부모님에 대한 마음이 더 애틋하군요.” 했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왜 그리 부모님께 끔찍한 효자였는지 이해가 된다. 그동안 서운했던 마음도 녹아내린다. 그럼 지금 당신이 제일 하고 싶은 것이 뭐예요? 물으니 그 전에는 하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이제는 그냥 접고 산다고 한다. 가족을 부양하느라 자신의 꿈도 접고 사는 사람…….
“그런데 이제는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하세요. 당신이 원하면 반드시 할 수 있도록 상황이 돌아가고 저도 도울게요.”하니 “당신 요즘 정말 많이 변했어. 나는 당신하고 이렇게 얘기를 할 수 있는 것만 해도 좋아.”한다. 사실 남편이 어려서 아팠던 것도 시어머니와 남편이 나에게 여러 번 얘기를 했었다. 그러나 나는 제대로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고 더 이상 묻지도 않았었다. 상대와 하나 되어 가는 과정을 이렇게 체험해가니 요즘은 남편이 술을 마시고 오는 횟수도 많이 줄었고 내가 술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변하기 시작하니 갖가지 몸에 좋은 재료들을 가지고 와서 담가놓고 뿌듯하게 바라보며 서로 웃곤 한다.
그 전에는 눈앞에 일어나는 일들이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화를 내고 내가 원하는 대로 이끌려고 했었는데 이제는 전체를 생각하고 전체를 위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지를 먼저 생각하게 된다. 화가 날 때도 화가 나는 그 순간이 아닌 화가 나기 이전으로 돌아가 왜 이 현상에 화가 나게 되었는지를 먼저 살펴보고, 그 이전에 분명 내가 걸려서 해결 안 된 부분이 있었기에 화가 남을 알게 되면 어느새 눈 녹듯이 사라지게 된다. ‘화’라는 덩어리도 결국 내가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있을 때 나타나는 작용임을 알게 되니 자동적으로 그 상대를 이해하게 되었다. 모두가 내가 있기 때문에 시비분별을 하는 것이었다.
우리의 본질은 본래 청정해서 색으로 나와서 이런 천차만별의 현상들로 나투지만 그 이전으로 들어가 보면 결국은 본래 청정한 본질일 뿐이다. 불법공부를 통해 이러한 이치를 알게 되니 마음이 너무 너무 편안해졌다. 아무 문제없이 일체가 하나로 돌아가는 이 우주에서 나는 이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끊임없이 나를 정리하고 가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마음의 폭이 넓어짐을 느낀다.
큰마음으로 ‘내’가 없이 시비분별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자고 한다.
처음에 공부를 시작할 때 “모두가 다 평등하다. 일체 시비분별을 하지 말아라.” 라는 말씀을 듣고 일체가 다 평등하다는 말씀에 어른들도 나랑 똑같고, 자식도 나랑 똑같이 대해야한다고 생각을 했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마음은 낮아지고, 자식은 원하는 대로 하도록 했다. 그 깊은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었던 것이다.
개미나 부처님이나 똑같다는 것은 본질에 있어서 둘이 아니니 개미는 개미대로 하나의 객체로서 존중해주고, 부처님은 부처님대로 하나의 객체로서 소중하다는 의미임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자식은 자식대로, 부모는 부모대로, 개미는 개미대로 자신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하여 자신이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서 끊임없이 노력을 하고 상대를 나와 같이 둘로 보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평등하게 보는 마음이라는 것을…….
생활을 하면서 마음이 흐트러지고 경계가 다가올 때마다 입력되어있는 스님의 법문을 떠올리며 한 생각을 바꾸게 된다.
“머무르는 바 없이 마음을 내라.”
“그냥 자신을 몽땅 버리면 된다.”
“바쁜 중에 한가로움을 알면 끓는 물에 연꽃이 피리라.”
이렇게 하나로 통신이 되고 있으니 내가 끼고 있던 색안경을 벗고, 내가 밑바닥에 깔고 있던 고정관념들을 내려놓고 상대의 얘기를 들을 때의 표정과 내 생각을 깔아놓고 들을 때의 표정은 이미 다를 수밖에 없으며 상대도 본능적으로 안다. 말은 긍정을 하고 있더라도 상대는 이미 그 마음을 모두 읽어버리게 된다.
스님께서는 늘 말씀하시기를
사방이 터져있어서 내 한 생각이 곧바로 온 우주에 통신이 되며 한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체를 살릴 수도 있고 죽일 수도 있다고 하셨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마음을 굴려야 할 것인가? 술을 마시고 오는 남편도 자신의 업무의 연장으로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고 인정을 하고, 성에 차지 않는다고 투덜거렸던 대상인 자식도 그 자리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살고 있다고 인정하고 나니 서로의 관계가 편안해졌다. 바라보는 눈빛이 서로 편안하니 이제는 아무런 장벽 없이 서로 대화를 하게 되었다. 그 전에는 일방적인 내 얘기를 주장하고 상대가 잘못되었다고 단정하고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상대의 얘기를 귀담아 듣게 되니 서로 마음이 통하는 대화가 되는 것이다.
스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내 삶은 어떨까? 스님을 만났기에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나? ‘내’가 없는 마음공부를 하면서 참으로 행복하다. 이제는 어떤 일이 다가와도 우선으로 내가 해야 할 것이 마음공부임을 알기에 그것을 중심으로 놓고 해결을 하니 안 되는 것이 없다. 진심으로 그 상대의 얘기를 들어줄 때 마음이 하나가 될 수 있다. 체가 없는 이 마음을 어떻게 쓸 것인가?
이렇듯 내가 없이 나를 고정시켜놓지 않았을 때 내가 없으니 진리의 법망에 걸려들 것이 없고, 걸려들 것이 없으니 얼마나 자유로워지겠는가! “어느 것 티끌 하나라도 붙잡지 말고 모두 다 놓아라!” 하신 말씀 가슴 깊이 새기고 오늘도 싱그러운 하루를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