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로 속에 함께
김영순(여 41세)
내 나이 21살 때 시골에서 대구로 가족이 이사를 왔다. 엄마는 닥치는 대로 돈 되는 일을 하셨고 살림은 나의 몫이 되어 직장 다니랴 일하랴 몸이 약한 나는 늘 지쳐있었다. 그러던 24살 어느 봄날 선을 통해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만나고 며칠 지나 회사 갔다 오는 길에 피를 토했고 여기저기 병원을 찾아다녀도 병명이 나오지 않았고 온갖 유명하다는 곳을 다 찾아다녀도 원인을 알 수 없었다. 몸도 마음도 지쳐 있던 나는 건강마저 잃고 나니 삶을 포기하고 싶을 만큼 의욕도 없이 힘든 나날을 보내게 되었다. 그처럼 힘든 상황에서 현실의 도피처로 남편과의 결혼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러나 결혼 생활은 내가 원하던 도피처가 되어주지 못했다. 처음에 시어른들과 같이 살게 되었는데, 시어머니는 회사를 다녔고 살림은 나의 몫이 되었다. 시골이라 동네에 집도 몇 채 뿐이었고 친구도 대화할 상대도 없었다. 남편이 화물 운송을 하는 까닭에 집에 오는 시간도 일정하지 않았다.
남편은 4형제 중 막내다.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 효자라 소문이 나 있었다. 그러나 나한테만은 늘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었다. 가정은 이루었지만 생활비만 주면 가장 노릇은 다 했다 생각했고, 모든 것을 자기 하는 대로 따라주길 바랬고 시댁의 일에 너무 나서는 바람에 항상 내가 설 자리를 빼앗아버리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1년 정도 살다 분가를 했다. 분가를 해도 시댁에서는 무슨 일이 생기면 형님들보다 우리 집에 먼저 연락을 했고, 그럴 때 마다 항상 너무 나서는 남편 때문에 도리어 잘해도 욕을 먹고 못해도 욕을 먹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런 남편을 보면 항상 못마땅했다. 대화라도 되면 속이나 시원할 텐데 대화 자체가 되지 않으니 아예 말문을 닫고 살았다. 상대와 어떻게 소통을 시키며 살아가야 하는지 몰랐고 그냥 상대는 바뀌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아예 마음의 문을 닫고 살다 보니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었다. 남편에게 더 이상 아무런 관심도 애정도 없었다.
몸의 병과 함께 마음의 병까지 들어 이제는 아무런 살 의욕도 없었다. 사는 것이 고통이었다. 그런 생활을 3년 정도 했을 무렵이었다. 딸아이가 백일이 지난 어느 날 남편이 대형 사고를 냈다. 세 사람이나 다치고 차도 한 대 물어주어야 하는 큰 사고였다. 그 바람에 생활도 어려워진데다 이미 몸도 마음도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나는 밖으로만 도는 남편 때문에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어 딸아이만 데리고 무작정 대구로 왔다. 그대로 있으면 죽을 것만 같았기에 내가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렇게 대구에 와있던 중 언니 따라 절에 나가게 되었고, 거기에서 지금의 선원장스님을 만나게 되었다. 처음 보는 순간 나와 어딘지 모르게 통할 것 같아 스님이 편하고 좋았다. 그렇게 절에 다니게 되었고 신행회에 가입하면서 스님과 함께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 동안 해결하지 못한 아픈 마음을 내놓았고 너무 억눌린 탓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누군가 나의 말을 들어주니 속이 시원했다.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내 마음을 속속들이 다 알아주시고 받아주시며 바다 같은 자비로 감싸주시는 스님이 한없이 좋았다. 스님께 마음공부를 배우면서 차츰 몸도 마음도 안정이 되어갔고 일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일을 하면서도 법회 날에는 꼭 공부를 하러갔다. 그렇게 6년이라는 세월이 흘러 아이가 초등학교 입학할 쯤 포항으로 이사를 해서 다시 남편과 함께 살게 되었다. 그런데 남편의 사업이 잘 되지 않아 카드빚을 많이 지게 되었고, 함께 산지 1년 6개월 만에 어쩔 수 없이 또다시 아이만 데리고 남편을 떠나 대구 친정에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걱정보다는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감사했고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일체가 둘이 아니다’라는 스님의 가르침에 따라 한 번도 남편을 원망하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다 보니 힘든 현실 속에서도 힘들지 않았고 오히려 이런 일들을 통해 공부를 할 수 있는 것이 감사했다.
친정살이를 하면서 여러 불편한 점도 있었고, 많은 가족이 같이 살다보니 여러 가지 문제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대함에 옳고 그름을 가리지 말라는 스님 법문을 실천하며 살다보니 어려운 경계 속에서 오히려 지혜가 생겨났고 모든 일들이 소중한 공부 재료가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공부를 하던 중 의지하던 스님께서 머나먼 아르헨티나에 가셨고, 나는 스님이 떠난 자리에 더욱 더 스님께서 가르쳐주신 법문을 생각하며 행을 하기 시작했다. 친정에서 3년이 될 무렵 그 동안 꿈에서라도 한 번 뵙기를 바랐으나 한 번도 뵙지를 못했었는데 드디어 스님을 만나 공부하는 꿈을 처음으로 꾸게 되었고,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처럼 그 꿈을 꾼 지 하루 만에 그토록 기다리던 스님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스님께서 다시 한국에 돌아오신 것이었다. 꿈에 그리던 스님과 다시 만나 공부할 수 있게 되어 뭐라 말할 수 없이 감사했다.
곧 선원이 개원되었고, 개원과 동시에 남편은 그 동안 하던 일을 정리하고 대구에 와서 같이 살게 되었다. 처음에는 남편과 어떻게 맞추며 살까 걱정도 되었지만 그 동안 스님께 배운 공부를 실천해보리라 다짐을 하였다.
예전처럼 피하지 않고 이제는 스님의 가르침을 남편이라는 대상에도 철저하게 실천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무조건 둘로 보지 않고 무조건 내가 죽기로 결심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자기 나름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있던 아픈 마음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몰라 힘든 마음을 나에게 하소연 했다. 그 동안 한 번도 남편 말을 진심으로 받아주지 못했고 그냥 마지못해 싸우기 싫어서 건성으로 들었는데 '오늘은 꼭 잠을 안자고서라도 남편 말을 들어주어야 되겠다.' 하고는 남편 말을 진심으로 경청했다. 무슨 말을 해도 시비하지 않고 들어주고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주었다. 그러자 남편이 너무나 좋아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부터 그렇게 말 한마디 행동 하나 함부로 하지 않고 남편이 무슨 말을 해도 겉으로 뿐만 아니라 속으로도 시비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다 보니 한 달이 가도 싸우지 않고 1년이 지나도 싸우지 않고 살게 되었다. 참으로 이 공부가 위대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토록 지옥과 같았던 결혼생활이었는데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실천하면서 비로소 사람 사는 행복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체험을 하면서 과거의 나의 모습이 보였다. 그 동안 상대 때문에 내가 힘들게 산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일체가 나로부터 비롯되었으니 남의 탓이란 일체 없다'고 하신 스님의 말씀을 비로소 알 것 같았다.
내 생각을 바꾸니 상대가 바뀌는 걸 보고 '그래, 둘이 아니구나. 마음이 통하잖아. 나의 마음 따라 상대가 그렇게 보이는구나.' 하는 것을 깊이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모든 생활에서 내 모습을 보면서 조절하며 살게 되었고 그렇게 모든 것을 둘로 보지 않고 마음으로 다 받아들이니 그 속에서 지혜를 배우게 되어 말 한마디 못하던 집안에 이제는 가족이 마음껏 마음을 표현을 하면서 화목하게 살게 되었다. 나에게 완전히 새로운 삶이 주어졌고 우리 가족에게 상상할 수 없었던 행복의 웃음꽃이 피어나게 된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스님의 가르침 덕분이다. 스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에게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현실인 것이다. 스님께 감사한 마음을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다.
스님께 마음공부를 배우면서 건강도 좋아져서 몸과 마음이 둘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이제는 병을 겁내지 않게 되었다. 그 동안 몸을 통해서도 참 많은 체험을 했다. 그 중에서 기억나는 것 두 가지만 소개하려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팔의 통증이 찾아왔다. 팔을 움직여 먹고 사는 나의 직업은 더욱 나를 좌절하게 만들었다. 남편과 한방병원을 찾아가서 진찰을 했다. 의사는 일을 계속 하면 앞으로 볼펜조차 잡을 수 없게 된다면서 당장 일을 그만 두고 집에서 휴식을 취하라 했다. 갑자기 걱정이 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나 마음이 답답하고 막막해졌다. 당시 남편도 일이 잘 안되어 일을 그만 두려고 하던 중이었기에 나마저 몸이 아프니 남편은 인상이 굳어지고 짜증을 냈다. 어느 누구에게도 아프다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밤에 잠을 자는데 극심한 통증 때문에 바로 누울 수 없을 정도였고, 저녁마다 잠을 잘 수가 없어 혼자 일어나 소리 없이 울곤 했지만 누가 대신 살아 주고 누가 대신 아파줄 수 없는 나만의 아픔이었다.
그러다 문득 이것도 스님께 배운 대로 실천해보자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 스님법문처럼 본성 자리에 믿고 맡겨보자. 죽는 것도 사는 것도 오직 거기서 하는 것이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죽든지 살든지 무조건 다 놓아버리자.' 하면서 실제로 믿고 놓아나갔다. 아플 때 마다 '내가 없지. 내가 하는 것은 하나도 없어.' 하면서 자꾸 놓아버렸다. 그렇게 해 나가기를 한 달 정도 했을 무렵 어느 날 보니 그토록 아팠던 팔의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이런 도리를 가르쳐 주신 스님께 한없이 감사했다.
작년 겨울은 유달리 추위를 많이 타서 일하고 집에 오면 누워있는 시간이 많았다. 설날 되기 전 꼬박 이틀이나 밤을 새우고 포항의 시댁으로 설을 맞으려고 내려갔다. 작년 이맘때 쯤 시아버님께서 돌아가셨고 처음으로 맞은 시아버님 제사였다. 처음 제사라 설까지 세 번이나 상을 차려야 했고, 이틀 동안 잠을 자지 못해 몸은 지쳐있었고 친척이 많아 저녁준비까지 하다 보니 눈 코 뜰 새 없이 바빴다. 그러다 보니 잠시의 쉴 틈도 없이 그냥 일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제사상을 두 번 차렸고 시간은 새벽이 넘었다. 이제 설날 상만 차리면 될 것 같아 잠시나마 자리에 눈을 붙이려고 방에 들어가 누워있는데 숨조차 쉴 수 없이 배가 아파왔다. 너무 아파서 바로 누울 수도 없었고 잠도 오지 않아 그냥 아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다 갑자기 배가 너무 심하게 아파오면서 변의가 느껴져 화장실엘 갔다. 볼일을 보고 일어서는 순간 눈을 의심했다. 변기에 가득한 것은 변이 아니었다. 손을 넣어 만져보니 피였다. 변기 속에 핏물이 가득했다.
순간 어떻게 하나하는 생각이 들다가 '죽고 사는 것을 다 놓아야 한다'고 하신 스님 말씀이 생각났다. '그래. 어차피 죽을 목숨이면 죽을 것이고 살 목숨이면 살겠지.' 하고는 즉시 놓아버렸다. 오히려 놓으니 마음은 편했고 오랜 만에 잠도 푹 잤다. 병이 있었던가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물론 병원에도 가보지 않았고 그 이후로 아무 이상이 없었다.
이런 식으로 많은 체험을 하다 보니 마음으로 집착을 하지 않으면 병도 사라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했던 나는 힘든 고비가 많았다. 그러나 이 공부를 하면서 스님께서 '마음의 병이 몸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으로 붙들고 있는 것을 다 놓아버려라. 내가 없는데 병이 어디 있느냐. 죽고 사는 것을 다 놓아버려라.' 고 하신 말씀을 마음에 새기면서 실제로 스님 말씀대로 그렇게 놓아나갔고 그러다 보니 많은 체험을 하게 되었다. 화장실에서 피를 쏟아도 겁내지 않을 정도로 믿고 맡기다 보니 오히려 내 자신이 나를 죽이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와 같은 체험을 통해 이제는 병을 겁내지 않게 되었다. 생활 속에서 부딪치는 크고 작은 경계들을 공부재료로 삼아 상대도 나도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필요에 따라 마음을 활용하여 지혜를 내어 쓰고 하다 보니 몸도 많이 건강해졌고 마음도 느긋해졌다.
나는 이 공부를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누리며 살게 되었다. 정말 스님을 만나 나의 인생이 바뀌었고 모든 것이 바뀌었다. 공부를 하면서 '내가 이 공부를 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아마도 스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동안 스님께 공부를 배우는 시간들은 나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들이었다. 스님께 금강경을 배우면서 '어쩌면 이런 공부가 있을까!'하고 수없이 감탄했고, 법문 중에 여러 가지 비유의 말씀에 원 없이 웃어도 보았고, 여러 경전들을 배우면서 스님의 어마어마한 법문에 우리 스님이 예사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어떻게 저런 분을 만났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벅차고 감사해서 눈물이 난다.
우리 스님은 내 가슴속에 언제나 엄마 같은 존재이다. 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다 받아주시는 분, 생각만 해도 감사의 눈물이 솟아나는 그런 분이다. 과거의 나처럼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 힘든 분들이 있다면 누구든 스님께 이 공부를 배워 지금 내가 누리는 이 행복을 모두 누리실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