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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과 같은 우울증에서 벗어나

                                              죽음과 같은 우울증에서 벗어나 

                                                                                                        김벽향(가명)  

 

 

2006년 겨울 나의 우울증은 극에 달해 있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나 때문에 불행하고, 나만 없으면 편안할 것을  

내가 불행을 몰고 다니는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다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들 옆에서 조용히 사라져 주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어디 가서 혼자서는 살아갈 자신도 없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하나, 죽음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 속에 사로 잡혀서 아내의 자리도 엄마의 자리도 포기한 채 

‘어떻게 죽으면 고통 없이 빨리 죽을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남편도 아이들도 보이지 않았었다.
남편이 얼마나 힘들어하는지, 아이들이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드디어 결심을 하고 울면서 유서 한통을 썼다.
아이들에게는 좋은 엄마가 빨리 생기기를, 남편은 좋은 아내를 맞이하기를 바라며
유서를 쓰고 있으니 지난날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1990년 12월 결혼을 했다.
누구나 그렇듯이 부푼 꿈을 가슴에 안고 새로운 인생의 시작을 기대하며 결혼을 했다.
결혼식을 하기 전에 친정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결혼이란 네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점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네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에 따라서 달라질 것이다. 한 집안이 편안하려면 부모가 멀리 있든 가까이 있든,  

맏이는 부모와 같고 맏이가 편안해야 집안의 흔들림이 적다는 것만 기억하고 살아라.”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기억하며 큰 동서를 형님이 아니라 부모님이라 생각하고 모든 것을 순종하고 

마음에 불만이 생기더라도 “내가 나빠서 생기는 것이야. 형님은 부모님과 같다고 했어!”  

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스렸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내가 그릇 하나를 사려해도 형님에게 허락을 얻어야 했고,  

남편 옷 하나 사는 것도 의논 없이 샀다고 서운해 하셨다.
직장을 다니고 있는데도 조카의 학교 운동회까지 참석하기를 원하셨고, 사정이 어렵다고 말하니 난 형제도 필요 없는 돈만 중요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나의 결혼 생활에서 ‘나’는 존재 할 수가 없었다.
아니 나의 생각과 나의 의지는 필요 없었다.
형님이 오라고 하면 무조건 가야했고, 형님이 죽으라고 하면 죽지는 않아도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편안했다.
그러다가 한번은 참지 못 하고 내 생각을 이야기 했다가 온 집안이 난리가 나고,  

친정에서 그렇게 배워왔냐고 하면서 “집안이 망하려니 별게 다 들어와서 난리다.”라고 하셨다.  

 


‘나’라는 존재는 어디에도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게 생활을 하면서 눈물 흘리는 날은 점점 많아지고 모든 일에 바람막이가 되어주지도 못하는 남편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형님에 대한 원망과 미움이 같이 하나씩 하나씩 가슴에 쌓여 박혀가고 있었다.  

 

한번은 이혼을 생각하고 남편과 아이들 몰래 가방을 챙겨 나와 후배의 집을 찾은 때가 있었다.
후배가 “언니! 집을 나오려면 깨끗이 끝내고 나와라. 이렇게 나와서 형님에게 미안하다는 사과는 받을 수 있을지는 몰라도 기분상하는 소리 좀 했다고 집 나갔던 여자라는 소리 안할 것 같아? 아마도 형님성격에 죽을 때 까지 할 걸?”라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정말 그렇겠다 싶어서 다시 집에 돌아온 적도 있었다.
 
눈물과 한숨 속에서도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눈물을 삼키면서
“언젠가는 나의 노력을 알아주겠지” 하고
마음을 달래가며 죽을 힘을 다해 살아냈다. 

 

그렇게 어떤 모습이 내 모습인지조차 생각할 겨를도 없이
10여년의 세월이 흐른 어느 날,  

 


설날 음식장만을 위하여 시댁 부엌에서 세동서가 일을 하고 있을 때 어머님께서 말씀하셨다.
“얘들아, 나 다음 달에 중국 여행 간다. ◯◯에서 보내준대. 우리 돈은 개인 여비만 준비하면 된다는 구나.”하셨다.
우리들은 “좋으시겠어요!”라는 말만 하고 그 이야기는 끝이 났다.
한 달 후 어머님이 여행가실 때가 되어서
‘형님께 의논할까 하다가?’ 하다가 ‘형님이니까 오죽 알아서 잘하시려고!’ 

하는 생각이 들어서 따로 의논드리지는 않고 우리 형편껏 어머님께 용돈을 보내드렸다.  

 


그리고 며칠 후 둘째형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동서! 어머님 여행 가는 거 언제 알았어? 그리고 들었으면 우리한테 이야기 좀 해주지, 동서만 알고 용돈을 보내면 우리는 뭐가 되지?” 하신다.
“설날에 부엌에서 음식 할 때 이야기 하셨잖아요?” 하니 “우리는 들은 적 없어!” 하시며 화를 내신다.
그 다음 큰형님이 전화 와서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이렇게 저렇게 화를 내시다가
“나는 너희 신랑이랑 너랑 안보고 살았으면 원이 없겠다!” 하신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굳게 닫히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내가 뭘 어떻게 했는데 이런 말을 들어야하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지?
내가 그동안 형님한테 어떻게 하며 살았는데…….  

어쩌면 사람이 사람한테 안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말을 할 수가 있지?’
내 마음을 나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워서 숨을 쉬는 것조차도 힘겨워졌다.
형님이 너무 너무 미웠고, 밉고 또 미웠다.
형님에 대한 미움은 태산처럼 커져만 같고, 형님의 소원대로 형님을 명절 때 외에는 보지 않고 살았다.
명절 때 뵙는 것도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만 그러기로 나 혼자 정하였다.
형님을 미워하면서 하루하루 스트레스로 몸부림쳤고, 몸부림치면 칠수록 점점 나락으로 빠져 들어간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했다. 내일 죽는다고 해도 아니 지금 당장 죽는다고 해도 형님만큼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내가 죽은 후에도 형님의 조의는 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빠져들면서 우울증이 생기고 점점 심해지는 것도 모르면서 살아왔고,
내가 살고 있어서 모든 사람에게 불행이 오는 것만 같았다.
나만 없어지면 모든 사람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렇게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내 삶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울면서 남편과 아이들에게 남기는 눈물 젖은 유서를 썼다.  

 

“이젠 마음정리가 끝났다. 모든 것을 끝내자.”  

 

마음의 정리를 마치고 죽음으로 발을 내어 디디려는 순간, 전에는 없었던 알 수 없는 공포가 밀려들어 발을 내디딜 수가 없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 생각하니 ‘내가 죽기는 왜죽어! 죽을 용기로 한번 살아보고 안 되면 그 다음에 죽어도 늦지 않잖아!’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죽을 용기조차 없는 내가 더 싫어지는 것이었다. 

 

이제는 살고 싶어 몸부림을 쳤지만, 혼자서는 헤어나기가 어려워서 병원을 찾았다.
그러나 정신신경과에서 처방해준 약을 먹으니 몸이 한없이 쳐지고 하루 종일 잠만 자게 되었다.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였고 감당이 되지 않았다. 

 

'내가 왜 이러지? 정신 차리자!' 하는 생각에 TV라도 보자싶어서 시청하고 있는데, 부모님의 정신병원 치료이력으로 인해서 자식이 결혼을 하지 못하고 울면서 헤어지는 장면이 나왔다.
그것을 보면서, '아 그렇구나! 저렇게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나의 의지는 다시 무너지고…….  

'어떻게 해야 하나? 다른 방법이 없을까?' 하고 수없이 고민했다.  

 


이번에는 한의원을 찾게 되었다.
처음에 “이러저러하여서 왔습니다.” 라고 말씀드리니 원장님 하시는 말씀이 

“한국여성 95%가 자기가 화병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하며 웃으신다.
“나는 죽음을 생각할 만큼 힘든데…….”
원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래도 한약을 지어 먹으면서 생각과 마음을 바꾸려 노력했으나 쉽지는 않았다.
마음의 병을 약으로 치료하려고 하니 더 어려웠다는 것을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렇게 힘겹게 지내던 어느 날 우리 집이 이사를 하게 되었다.
새로 옮긴 곳은 대학교 앞이었다.
이사를 하고난 어느 날 하루는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나서 TV를 시청하다가 화장실 가려고 일어서는데 

숨이 쉬어지질 않았다.
숨을 쉬어 보려고 가슴을 두드려 보았지만 쉬어지질 않았다.  

 

눈물이 흘렀다. 하염없이 흘렀다.
‘정말 이렇게 밖에 살 수 없을까? 꼭 이렇게라도 살아야하나? 아니 이러다가 정말 죽으면 어떻게 하지?’
하는 생각들이 뒤죽박죽 떠올랐다.
그래서 마음이나 달래보려고 집근처에 있는 사찰을 찾게 된 것이 바로 선원과의 인연이었다.  

 

참으로 운명처럼 새로 옮긴 집 바로 뒤에 선원이 있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동안 내가 생각하던 사찰과는 많이 달랐다.
내가 아는 사찰은 무엇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고, 그것을 위해 정성을 다해 수없이 108배를 해야 하고, 3천배를 해야 하고, 백일기도, 천일기도를 해야 하고 그런 것이었다. 그렇게 아는 것이 전부였다.  

 

화요일 ‘언어로 이루는 자기완성’ 법회에 참석을 했다.
그런데 선원은 마음공부를 하는 곳이란다.  

 

‘마음공부? 마음공부가 뭐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도대체 무슨 말들을 하는 것인지…….
말은 분명 한국말을 하는데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오지 말아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문을 나서는데, ‘육조단경 경전법회’라는 안내문을 보았다.  

실은 그 때 혼자서 육조단경을 읽고 있는 중이었다.
다른 사찰을 다니면서 육조단경이라는 이름을 우연히 듣고는 배우고 싶은 생각에 책을 사서 읽고 있는 중이었지만 내용이 너무 어려웠다.   


그래서 ‘아! 경전 공부는 여기서 하고 기도는 내가 다니던 절에 가서 해야지!’ 하면서 선원을 다시 찾게 되었다. 

 

2007년 9월 21일 육조단경 법회시간.  

 

선원장 스님께서 법문을 하셨다.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면 그것이 쌓이고 쌓여서 태산이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을 하여도 쌓이는 것은 없습니다.
아는 것은 쉽지만, 모르는 것을 하려면 누구나 어렵습니다.  


그러나 일단 시작해서 해나가다 보면 알게 되고 알고 나면 쉬운 것입니다.
그래서 차근차근 해나가다 보면 모든 게 이루어집니다.
하나하나를 이루면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한꺼번에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계속 해야지만 쌓이고 쌓여서 달라지는 것입니다.  

 

법은 본래 옳고 그름이 없습니다. 맞는 것도 틀린 것도 없습니다.
내가 잘하려고 하지 않으면 욕심이 없어집니다. 미움도 집착도 없어집니다.”  

 

이런 내용으로 법문을 하셨다. 어느새 나는 법문에 몰입되어 있었다.  

 

다시
“어떤 일을 할 때에도 내가 없고 그냥 할 뿐입니다.” 

 

라는 말씀을 듣는 순간 머릿속은 하얗게 변하고, 귀에는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아! 그렇구나, 그런 것이구나!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구나! 그렇게 살아야 하는데 나는 알아 달라고 소리치고 살아서 힘든 것이었구나. 그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는
‘그래, 이거야! 내가 찾던 게 이거였어!’
하는 느낌을 받았고,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아듣지도 못하면서 열심히 들었다.  

 

들으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우울증이라는 것은 나의 욕심이 채워지지 않을 때 생기는 마음의 병이라는 것을,  

그리고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서 더욱 원망이 깊어져 간다는 것을…….  

 

스님의 법문을 듣고 또 들으면서 알았다. 형님에게 내가 잘나 보이고 싶어서, 형님보다 잘나고 싶어서, ‘당신들은 그렇게 해도 나는 당신들과 다른 사람이야!’ 라는 의식을 깔고 모든 일을 해서, 그렇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만큼 나를 인정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인정받지 못하는 내가 있어서 힘이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나를 세우려 하면 할수록 ‘가짜 나’만이 세워지면서 고통이 동반 되었던 것이었다.  

 


'내가 없이 해야 한단다. 욕심을 버려야한단다.' 

 


나는 욕심이 없다고 생각 하고 살았는데, 최소한의 욕심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욕심이 너무 많았다.
스님의 법문을 통해 그 동안 몰랐던 내 모습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너무나 많이 가지고 있던 욕심 중에서 큰 욕심 몇 개가 떨어져 나갔다.
좋은 동서가 되고 싶었던 것과 좋은 아내, 좋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것을  

꼭 하지 않아도 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냥 화나면 화나는 대로, 싫으면 싫다고 표현하면서 살아 보았다.
편안했다 정말 편안했다.
한 생각 바꾸었더니 아니 몇 개의 욕심을 버렸더니 너무나 편안해졌다.
더 이상 욕심을 늘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우울증으로 아니, 다시 말하면 나의 욕심을 어쩌지 못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서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그때가 지금은 너무 까마득하고 남의 얘기를 하는 것 같이 느껴질 때가 많다.
살아가면서 제일먼저 내가 편안해져야 내가 만나는 모든 사람이 편안할 수 있다는 것을 느끼고 배우는 중이다. 

 


그리고 마음이 편안해지니 건강도 달라졌다. 전에는 어디를 다녀오거나 무슨 일을 하고나면 몸이 피곤해서, 몸이 아파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요즘은 하룻밤만 푹 쉬고 나면 몸이 개운해진다.
또 가끔씩 이런 질문도 받는다.
“피부 좋아졌네? 화장품 어떤 것으로 바꾸었어?”하는 질문이다. 마음이 편해지니 피부조차도 달라지는 것 같다.  

 

또 있다.
우울증으로 시달릴 때는 살도 많이 쪘는데 마음이 편해지고 나니 몸무게도 10Kg 이상 줄었다. 아직 초심자여서 스님의 가르침을 다는 모르지만 이것만은 확실히 알겠다. 욕심이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과,  

그리고 욕심을 버리면 편안해 진다는 것 말이다. 

 

이렇게 마음 편하게 살 수 있게 해준 선원과는 깊은 인연인가보다. 몇 년 전에 벌써 꿈을 꾸었으니 말이다.
언제쯤인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선원에 다니기 전에 기이한 꿈을 여러 번 꾸었다.  

어느 날 꿈에 장소는 대학교 앞이었고, 길에는 무슨 공사를 하고 있는지 어지러운 상태였고  

우리 가게도 아닌 곳에서 옆구리에 책을 끼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 공부하고 왔어요.”,
“무슨 공부 하고 왔는데?”,
“마음공부하고 왔죠!” ,
“어디서 공부하고 왔는데?”,
“여기 뒤 3층에서…….”  


그러다 잠에서 깨었다. 일어나 생각하니 우스웠다.
'대학교 앞에서 공부하고 왔다면 대학교를 다닌다는 이야기인데…….  

내가 이 나이에 대학교를? 그리고 거기는 우리가게도 아닌데 왜 거기서 이야기를 하고 있지?' 하는 생각에 '이건 개꿈이야!'생각하고 잊어버렸다.  

 


그리고 어느 날 꿈에는 법당 안 이라고 하는데 부처님은 한분만 계시고 뒤에는 화분이 있고 문 앞에서 생전에 보지 못한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며 웃고 있는 꿈도 꾼 적이 있다. 그것도 개꿈이라고 생각하고 잊어버렸다. 또 어느 날은 어떤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많이 친한 것처럼 웃으면서 한참을 얘기 하는 꿈도 꾸었다.  

 

하지만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스님이 없었다. 여행지에 놀러가서 아니면 팔공산 갓바위에 올라갈 때 암자에 들러 스님을 마주치면 그냥 합장만 하는 정도지 웃으면서 이야기 나눌 정도의 친분이 있는 스님은 없었다. 그때도 “이상한 꿈도 다 있구나!” 라고 생각하고 그냥 흘러 보냈다.  

 

하지만 선원에 공부를 하러 다니던 어느 날 문득 잊어버리고 있었던 그 꿈이 현실에서 불현 듯이 보였다.
대학교 앞에서 선원에서 발간된 책을 옆에 끼고, 이사를 한 우리 가게 앞에서 남편과 우리가게에 온 손님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게 앞 도로에는 지하철 공사를 하고 있었고, 대화도 비슷하게
“나 공부하고 왔어요.”
“무슨 공부를 하고 하는데요?”
“마음공부하고 왔죠!”
“마음공부! 그게 뭐예요? 그리고 어디서 공부하고 왔는데요?”
“여기 뒤에 있는 선원에서요.” 

참 신비롭고 알 수 없는 일이다. 



어떻게 미래에 일어날 일을 꿈을 통해 미리 보았는지 말이다.  

 

그리고 다른 꿈은 선원 법당 문 앞에서 봉념보살님과 다른 보살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었고, 스님과 이야기 하는 꿈의 장면은, 실제로 이제 스님들을 믿고 따르며 공부를 하면서 너무나 자주 이야기하고 웃으며 지내고 있는 모습 그대로이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난 그냥 ‘아! 신기한 일도 다 있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까? 나와의 인연은 우연은 아닌가봐.’라고 생각 하면서 더 열심히 다니는 것도 있다.

 

선원에 공부하러 열심히 다니던 어느 날 또 꿈을 꾼 일이 있었다.

 

꿈속에서 우리 집은 산 밑에 있었고, 남편과 아이들은 집에 있었다.  

나는 집에 가기 위해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고 있었다. 처음에 올라갈 때는 비가 조금씩 내리고 있어서 우산 없이 다닐 수 있는 정도였으나 한참을 정신없이 올라가고 있는데 비가 소나기로 바뀌더니 산사태까지 일어나는 것이었다. 빨리 가기는 해야 하는데 가도 가도 그 자리, 어느새 마을은 흙탕물에 잠겨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 남편과 아이들도 흙탕물에 잠기기 직전이었지만 나에겐 더 이상 올라갈 힘이 없었다.  

우리 집은 어느새 지붕만 보이고 있었고, 그래서 나는 ‘이제는 끝이구나!’ 하는 생각에 손을 놓을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어디서 오는 빛인지는 모르지만 빛이 한줄기 환하게 비추더니,

그 빛 속에서 선원장스님의 모습이 보였다.

스님께서 내 앞에 이르러 창호지와 같이 얇으면서 좁고 긴 종이 한 장을 내미시면서  

구해 줄 테니 잡으라고 하셨다.  

다른 손에는 똑같은 종이가 석장이 들려 있었다.  

잡아도 나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 찢어질 것 같아서  잡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데 다시 한 번 말씀하셨다.  

 

“아무걱정 하지 말고 그냥 믿고 잡아요.”  

 

그 때 문득 드는 생각이 흙탕물에 휩쓸려 죽으나, 종이를 잡아서 올라가다가 종이가 찢어져서 떨어져 죽으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무런 생각 없이 찢어질 것 같던 종이를 잡았다.  

그 순간 내 몸은 붕 떠서 스님이 계시는 그곳으로 옮겨져 있었다. 신기하고 신기했다.  

그리고 더욱더 신기한 것은 다른 손에 잡고 계시던 석장의 종이에는 남편과 아이들이 같이 옮겨져 있었다. 내가 믿고 잡았더니 우리가족 모두가 산사태의 흙탕물에서 벗어나고는 꿈에서 깨어났다.

 

다시 그 꿈을 생각해보니 선원장스님의 말씀을 의심없이 무조건 믿고 따르면  

고해에서 벗어나 행복해 진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렇게 아무런 의심 없이 믿고 따르기만 한다면 말이다.  

 

끝으로 예전의 저처럼 우울증에 걸린 모든 이들에게  

나의 이 체험담이 작은 희망이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행복한 마음으로 선원을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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